그리스·로마 신화44 - 인류 최초의 여성이자 재앙이었던 그녀, 판도라
숨겨져 있던 엄청난 비밀들이 폭로돼 사람들을 충격과 혼란에 빠뜨릴 때 우리는 보통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판도라의 상자’에 대한 이야기는 신화에 등장합니다. 판도라는 과연 누구일까요? 사실 최초의 인류는 남자들만 존재했습니다. 남자만 존재했던 세상에 갑자기 나타난 판도라는 인류 최초의 여성입니다. 그리고 그녀로 인해 세상에 온갖 나쁜 것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와 그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지상으로 내려가 동물과 인간을 창조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면서 제우스는 동물들과 인간에게 각각 어울리는 능력을 잘 나눠주라며 여러 가지 능력들을 줬습니다. 지상으로 내려간 프로메테우스는 진흙을 잘 반죽해 다양한 동물들과 인간을 만들었고,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제우스가 준 다양한 능력들을 적당히 잘 나눠주라고 맡겼습니다.
에피메테우스는 새에게는 날개, 소에게는 뿔, 사자에게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말에게는 빠른 다리 등 각각에 어울리는 능력을 나눠줬는데,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깜빡해 인간에게 줄 능력을 남겨 놓지 않고 다 사용해버렸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동생의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해 인간에게 어떤 능력을 줘야할지 고심에 빠졌습니다. 만약 인간에게 아무런 능력을 주지 않으면 다른 동물들에게 금방 잡아먹힐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동생이 깜빡한 것이 미안했는지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특별한 것을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네 발이 아닌 두 발로 서서 걷게 하면서 손을 사용할 수 있게 했고, 다른 동물들에게는 주지 않은 기술들을 주기로 했습니다. 그는 아테나에게 집 짓는 법과 농사법,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는 법. 읽고 셈하는 법 등을 배워 인간들에게 그대로 전해줬습니다. 또한 헤파이토스의 대장간에서 불을 훔쳐 신들 몰래 인간들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렇게 인간들은 프로메테우스가 준 능력과 불로 편안한 삶을 살았습니다.
한편 이를 알게 된 제우스는 신의 특권이었던 불을 훔쳐다 인간들에게 준 프로메테우스에게 화가 단단히 났고, 그가 만든 인간들까지 같이 미워했습니다. 따라서 제우스는 인간들에게 어떤 재앙을 내릴까 고민하다가 ‘여자’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제우스의 명령에 따라 헤파이토스는 진흙으로 여신을 닮은 처녀의 모습으로 판도라를 만들었고, 여러 신들은 판도라를 구경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구경을 하던 신들은 판도라에게 선물을 주기 시작했는데 헤라는 생명과 옷을 주었고, 아프로디테는 아름다움과 매력을 선물했습니다. 아테나는 예쁜 옷과 허리띠, 화환, 황금 머리띠 등의 장신구로 치장을 해줬고, 헤르메스는 아름다운 목소리와 영악한 마음, 뛰어난 말솜씨를 선물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신들의 선물을 받고 판도라가 탄생했습니다. 실제로 ‘판도라’라는 이름에서 ‘판(Pan)’은 ‘모든’이라는 뜻이고, ‘도라(dora)’는 선물이라는 뜻으로 신들이 모든 선물을 줬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제우스의 이런 계획을 알고 있었던 프로메테우스는 남자만 있는 세상에 여자가 오면 재앙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해 에피메테우스에게는 만약 제우스가 선물을 보낸다면 절대로 받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었습니다. 머지 않아 제우스의 명령에 따라 헤르메스는 판도라를 에피메테우스에게 데려갔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판도라의 모습을 본 에피메테우스는 한눈에 반해 형의 말은 잊고 판도라를 아내 삼았습니다.
“이 항아리는 내게 주는 선물이다. 하지만 절대 열어봐서는 안된다”
판도라가 에피메테우스에게 가기 전 제우스는 황금 항아리를 하나 주면서 이같이 말했습니다. 에피메테우스는 판도라에 반해 정신이 없었지만 그녀가 들고 온 항아리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바로 알아보고 판도라에게 절대로 열어보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판도라는 에피메테우스와 결혼해 행복하게 살았지만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황금 항아리를 열어보게 됩니다. 제우스가 준 황금 항아리에는 고통과 질병, 가난, 전쟁, 슬픔, 노화, 죽음, 희망 등이 들어있었고, 판도라가 항아리를 여는 순간 그 모든 것들이 쏟아져 나와 이 세상의 인간들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판도라는 깜짝 놀라 얼른 항아리의 뚜껑을 닫았지만 미처 나오지 못한 희망만이 그 안에 남았습니다.
온갖 나쁜 것들이 가득한 항아리에서 미처 나오지 못한 희망은 대체 왜 그곳에 함께 들어있었을까요? 보통 희망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발전할 수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희망도 사실은 인간에게 재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언제가 죽지만 영원히 살 것처럼 기대하거나, 상황이 나쁜데도 근거 없는 희망을 품기도 합니다. 어쩌면 희망은 인간을 속이는 달콤한 환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희망이 없다면 절망도 없다는 말이 있는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하나 눈여겨볼 지점은 제우스가 인간에게 재앙을 내리기 위해 '여자'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화속에서 판도라는 악녀였을까요? 그렇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는 제우스의 계획에 이용되기 위해 신들이 만든 존재이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재앙의 원인이 아니라 신들의 권력 싸움을 위해 희생된 인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판도라는 성경의 이브와 공통점도 많은 편입니다. 둘 다 최초의 여성으로 판도라는 금지된 행동을 했고, 이브는 금지된 열매를 먹었습니다. 결국 그로 인해 인간 세상의 고통이 시작됐다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마지막으로 판도라가 연 것은 상자가 아닌 항아리였습니다. 헤시오도스도 판도라가 ‘항아리(pithos)’를 열었다고 썻지만, 16세기 네덜란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가 그리스 신화를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항아리를 상자라고 읽고 잘못 번역을 하게 되면서 우리에게는 ‘판도라의 상자’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항아리를 연 이후 판도라의 행적은 신화속에서 나오지 않지만 아마 대홍수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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